저는 어릴 적 집 앞에는 영산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으로 막혀있는 곳에 기와집을 짓고 살았습니다. 어머니가 당뇨로 실명하기 전까지 그 집에서 살았습니다.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동네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. 비록 가난했지만 영산강에서 잡은 꼬막(재첩), 장어, 이름모를 생선으로 밥상은 늘 풍요로웠습니다.
지금도 감사한 것은 아버지는 늘 아버지의 자리에 계셨고,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에 계셨다는 겁니다. 아무리 바빠도 어머니가 늘 건강한 밥상을 차려주셨기에 아버지가 오랜기간 건강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.
군대 제대 후 신학을 공부하고 안수를 받고 교회를 지키며 살게 되었습니다. 저는 그 때부터 비즈니스에 재능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. 저는 실명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었는데 그것을 안 주위 분들의 도움 덕분에 조선대에서 외부인으로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. 조선대 의대생들에게 권당 20만원 하던 의학원서를 복사해서 제본한 책을 만들어 팔았습니다. 당시 복사 한 장이 10원할 때였는데 1,800만원 주고 산 롯데캐논 건식 복사기로 1분에 68매가 자동복사해서 장당 30원에 팔아 큰 수익을 낼 수 있었습니다.
사실 군대 가기 전 당뇨로 고생하시던 어머니의 눈을 치료해 드리고 갔었는데 제대하고 나니 2차 실명으로 앞을 보지 못하시는 어머니를 제가 모시게 된 겁니다. 어머니께서도 막내였던 저와 함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. 저는 조선대에서 일하면서 아무리 바빠도 어머니 식사를 거른 적이 없습니다.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온전히 식사를 할 수 없는 어머니에게 일일이 반찬을 챙겨드리고, 하루 다섯 차례 조선대 운동장을 산책시키는 게 제 일상이었습니다.
그러던 중 어머니를 모시고 연희교회 김덕팔 목사님 부흥회에 가게 되었는데 맨 앞에 앉아있던 어머니에게 목사님이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. 그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.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어머니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셨고 그 후 2년을 건강한 모습으로 살다 가셨습니다. 교회에서 자느라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했는데 마지막까지 저를 찾았다는 말에 마음이 먹먹했고, 입관예배를 하면서 폭포수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.
저는 스물 여섯부터 마흔 세 살까지 온누리교회에서 경배와찬양 하스데반 목사님을 모시고 전국을 돌며 [경배와 찬양]이라는 찬양집회를 지원하며 살았습니다. 26세에 안수를 받은 후 오직 하나님을 알리고 찬양하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. 집회를 열고 경배와 찬양 테잎을 녹음하고 교회와 기독교백화점에 판매하는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. 특별한 직임 하나 없이 저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았던 그 일은 마흔 셋 제 몸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고 나서야 끝날 수 있었습니다. 그렇게 쓰러진 저는 의사가 더는 할 게 없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집에서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상태로 누웠습니다. 장가도 안 간 제가 그렇게 병들어 누워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아버님께 얼마나 죄송스러웠는지 모릅니다.